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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건강과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블로그입니다.
오늘은 조금 색다른 주제를 들고 왔습니다.
'장티푸스'라는 병, 한 번쯤은 들어보셨죠?
하지만 이 병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실존 인물 ‘장티푸스 메리’의 이야기까지 알고 계신가요?
오늘은 질병이 어떻게 역사와 얽히고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장티푸스란?
장티푸스는 살모넬라 타이피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대표적인 수인성 전염병입니다.
감염 경로는 오염된 물이나 음식 섭취, 주로 더러운 환경에서 확산되며,
초기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고열
- 오한과 두통
- 권태감, 복통, 설사 또는 변비
- 심한 경우 장천공 및 패혈증
치료하지 않으면 치사율이 10~20%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병입니다.
현재는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19세기까지는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장티푸스와 고대 전쟁
기록에 따르면 장티푸스는 기원전 430년, 아테네에서 대규모로 유행했습니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는 많은 외부인을 수용했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 리비아, 에티오피아 등을 거쳐 들어온 전염병이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테네의 힘은 약화되고, 스파르타가 패권을 잡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질병은 이후에도 유럽,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며 조선 시대 '염병(熱病)'으로도 불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염병
조선에서는 장티푸스를 ‘염병’이라 불렀으며, 대유행 시 감옥 내 죄수들부터 사망자가 급증했습니다.
감염력이 강하고, 당시엔 위생관념이 부족해 빠르게 확산되었죠.
사람들은 병을 피해 산으로 도망치거나, 환자들을 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염병하네’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도 여기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장티푸스 백신 개발의 역사
19세기 후반, 영국의 군의관 알무로스 라이트는 최초로 장티푸스 백신을 개발합니다.
당시 백신은 병원균을 햇볕에 말리고 처리한 후 병사들에게 주사하는 방식으로 실험되었고,
전쟁 중 실제로 접종된 사례에서 감염률이 극적으로 낮아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백신의 안정성과 사회적 신뢰 부족으로, 보급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존 인물, 장티푸스 메리(Typhoid Mary)
메리 말론(Mary Mallon)
- 1883년 아일랜드 태생, 미국으로 이민
-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요리사로 일함
- 그녀가 일한 가정마다 사람들이 장티푸스에 감염됨
최초의 건강한 ‘보균자’
당시엔 ‘보균자’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의심은 했지만 강제 구금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녀의 대변에서 살모넬라균이 검출되었고,
“건강한 보균자”라는 새로운 개념이 세상에 등장하게 됩니다.
격리와 재범
메리는 이후 이름을 바꾸고 다시 요리사로 일하며 2차 감염을 일으킵니다.
결국 2명의 사망자를 포함, 총 122명의 감염자를 만들고
죽을 때까지 강제 격리되는 운명을 겪게 됩니다.
이 사례는 공공보건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윤리적 문제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오늘날에는 백신과 항생제가 있기 때문에 장티푸스는 예방 및 치료가 가능한 질환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생이 열악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유행 중입니다.
특히 보균자 관리, 깨끗한 물 공급, 철저한 손 씻기와 같은 생활습관이 중요합니다.
마무리하며
장티푸스는 단순한 병이 아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전염병입니다.
질병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고,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오랜 시간 질병과 싸워 왔으며, 그 과정 속에서 의학, 백신, 위생 개념이 발전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병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